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-프랑스 전쟁 (문단 편집) ==== 나폴레옹 3세의 친정: [[스당 전투]] ==== ||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Karte_zur_Schlacht_bei_Sedan_%2801.09.1870%29.jpg|width=400]]|| || [[1870년]] [[9월 1일]] [[스당 전투]] 당시 병력배치 || [[프랑스 해군]] [[해군 육전대|육전대]]와 [[해병대]] 등으로 증원되었고 황제 [[나폴레옹 3세]]가 직접 이끄는 12만의 대군이 메츠 요새로 진군했으나 새로운 프로이센군이 메츠로 가는 길을 막아섰고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가 여의치 않자 프랑스군은 일단 가까운 [[스당]] 요새로 후퇴했다.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[[헬무트 폰 몰트케]]는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물샐틈 없이 '''스당 요새를 포위했다'''. 이후 프로이센군은 요새를 향해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고 이 포격에 실질적인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던 [[파트리스 드마크마옹]]이 중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져 버렸다. 그래도 프랑스군은 악착같이 포위망 탈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특히 4차례에 걸친 기병돌격은 프로이센군 포병의 십자포화에 실패로 돌아갔고[* 스당 요새에서 포위를 뚫으려고 프랑스 기병대의 자살에 가까운 돌격이 몇 번 이어지자 빌헬름 1세는 "진정 용감한 사람들" 이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.] 애당초 임시로 들어간 스당 요새에 식량이나 탄환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을 리도 만무했다. || [[파일:external/www.akg-images.de/AKG73670.jpg|width=600]] || || [[스당]] 항복.[* 독일어 작품 이름: Kapitulations-Verhandlungen von Sedan.][* 안톤 알렉산더 폰 베르너(Anton Alexander von Werner, 1843 ~ 1915)가 1900년에 만든 작품으로 원래는 "서기 19세기 이야기 연도(The story of the nineteenth century of the Christian era)"라는 책에 실린 삽화에 흑백 작품이었으나 어려가지 이유로 별도로 [[유화]]로 그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.] || 거기다가 프로이센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하니 9월 1일 [[나폴레옹 3세]]가 항복했다. 나폴레옹 3세가 겁쟁이가 아니라 애초에 [[스당]] 요새로 쫓겨들어간 순간 별 대책이 없었다. 병력도 적고 화력도 프로이센군이 강했기 때문이다.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640px-BismarckundNapoleonIII.jpg|width=600]] || || 스당 전투 이후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[[나폴레옹 3세]][br][[1878년]] 빌헬름 캄프하우젠(Wilhelm Camphausen) 작품, || 나폴레옹 3세는 항복을 하면서 프로이센의 군주 빌헬름 1세에게 자비를 구하려고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이를 막아섰고 결국 아무런 관용 없이 장교를 제외한 병사는 모두 무장 해제당하고 포로로 잡힌다.[* 굳이 비스마르크가 막아서지 않았어도 관용 없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.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나폴레옹 3세의 [[황후]]인 [[외제니 드 몽티조]]가 빌헬름 1세에게 남편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으나 [[빌헬름 1세]]는 거절하고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다. 참고로 이때 받은 편지는 훗날 1차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빌헬름 1세의 손자인 [[빌헬름 2세]]가 퇴위당하자, 외제니 황후는 그 편지를 고스란히 독일로 돌려보내줬다.] 여담으로 이 전투가 일어난 9월 2일은 [[스당 전투의 날]](sedantag)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[[독일 통일]]을 기념하는 국경일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